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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mazing World of Gumball/팬픽

The Loop 13 매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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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해당 팬픽은 2011년 12월, 검볼 1시즌이 한창 방영중일때부터 쓰여져 왔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검볼의 설정과 다를 수도 있으니, 시즌 1 분위기로 봐 주시면 되겠습니다.




[MsPenguin]


본 역주는 이 픽션과 검볼에 대한 어떠한 권리도 일절 갖지 않음을 밝힙니다.





The Loop

Written by Mr. Page


원본 : The Loop Chapter 13. The Knot


번역 by MsPenguin



독서 연령: Fiction K+ (만 9세 이상)


장르: 판타지/유머



검볼은 살면서 최악의 날을 겪고 있고, 이건 그걸로 끝나지 않네요. 사실, 절대 끝나지 않아요! 검볼은 타임 루프에 갇혔고, 내일이 오기를 바란다면, 뭐가 문제인지 맨 밑바닥까지 샅샅히 뒤져봐야하죠.




13장. 매듭


  검볼은 무한한 시간 속에서 하고 싶은 것이라면 뭐든지 하는 한편 이어지는 반복 속에서 기회를 엿보며 빈둥거리고 있었다.


  (늘 그랬듯이) 6시 20분에 침대에서 일어난 검볼은 부엌으로 내려가 자칭 ‘오파 댄스’라는 것을 선보였다. 이는 어머니의 모든 중국 접시를 챙겨 “하바 나길라”라고 흥얼거리며 머리에 대고 깨 버리는 짓이었다. 사기그릇이 깨지는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본 니콜은 정신을 잃고 한 때 가보였던 것들의 흔적과 함께 바닥에 널브러졌다. 이렇게 어머니가 불쾌한 기분으로 바닥에 미동도 없이 쓰러져 버린 모습을 보는 건 검볼에게도 그다지 기대되거나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일이 오면 상관없을 일이었기에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하긴 나쁠 게 뭐가 있겠는가? 게다가 어머니의 반응에 더해서 이마에 멍이 약간 들고 이가 몇 개 빠지긴 했지만 춤은 나름 우스운 편이었다.


  학교의 점심시간도 검볼이 장난에 써먹을 수 있는 시간 중 하나였다. 파스타, 당근, 과일, 그리고 초콜릿 민트 케이크조차도 너무 질려버린 나머지 검볼은 식판에 놓인 음식을 보는 것만으로도 헛구역질이 났다. 다행히도, 그는 마침 이 지겨운 분위기를 날려버릴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말 그대로 식판을 날려 버렸다.


  “음식 전쟁이다아아!!!!!!” 그가 고함을 지르며 전방을 향해 식판을 투척했고, 제이미, 보버트와 토바이아스가 음식에 뒤덮였다. 곧 광기가 뒤따랐다. 모두가 각자의 점심밥을 던지기 시작해 허공을 가른 음식들이 웃음 짓는 얼굴들에 명중하고, 벽을 미트소스로 칠하고, 바닥을 과일과 우유로 적셨다. 그리고 천장에 붙은 뭉개진 케이크는 퍼져 가는 곰팡이 같은 인상을 주었다. 검볼은 이 행동의 대가로 4주간 정학처분을 받았지만, 이 벌이 하루 이상 가지 않을 거라는 기쁨이 가슴이 터질 정도로 그를 웃음 짓게 만들었다.


  다음 반복이었다. 검볼은 뻔뻔스러워지기로 한 건지 그냥 생각이 없었던 건지 자칭 ‘키스의 날’이라는 것을 제정했다. 내용은 단순했다. 남자든 여자든 보이는 대로 뽀뽀해 주기. 단, ‘입술’엔 말고. 루프와 함께하고 있음에도 검볼은 그건 조금 선을 넘은 게 아닌가 생각했다. 게다가 그 소중한 순간은 아무리 긴 시간이 걸린다 할지라도 오직 페니만을 위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이 아이디어는 썩 괜찮았다. 아나이스는 볼에 가볍게 뽀뽀를 당했지만 그다지 싫어하는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방긋 웃기까지 했다. 다윈은 약간 미심쩍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형제간의 우애라고 생각하며 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니콜은 귀여운 생각이다 싶었는지 그에게도 뽀뽀를 해 주었다. 그러곤 곧장 접시 얘기를 꺼내며 화를 내었지만 말이다. 리처드는 그 행동이 새 넥타이 덕분이라고 생각해 나가서 한 벌 더 사고자 했다.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진 래리는 고통을 줄여 줄 아이들다운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움찔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검볼은 로빈슨 씨 네는 거르기로 했다. 두 사람 모두 그 날 아침에 집에 없었을 뿐더러 그 정도로 나이든 사람에게 뽀뽀를 해 주는 건 뭔가 꺼림칙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정말로 했다면 아마 한 대 맞았을 것이다.


  학교로 가자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딱 검볼이 바라는 대로였다.


  대부분의 남자아이들은 키스를 받자 화를 냈다. 검볼이 그들을 쫓아다니고 덮치며 기겁하게 만든 일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예외의 경우는 그저 당황하기만 한 로키와 장난이라며 가볍게 넘긴 레슬리 뿐이었다.


  여자애들의 경우는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기쁘게도 페니는 얼굴을 붉히며 상냥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검볼이 몰리, 테리, 그리고 카르멘까지 차례대로 입을 맞추는 걸 보기 전까진 말이다. (마지막의 경우는 선인장 가시 때문에 좀 아팠다.)


  잠시 동안 이 네 명의 여자아이들은 입을 벌린 채로 얼굴을 붉혔지만 곧 복도를 뛰어다니며 (아무 일 없는 듯) 다른 사람들에게 입을 맞추는 검볼을 향해 성질을 냈다.


  수지는 짭짤한 맛이 났고 마사미는 짜릿했다. 진짜 말 그대로 그녀가 그를 향해 번개를 내리쳤으니. 레이첼은 그의 뺨을 후려쳤다. 그리고 자신의 여자친구에게 뽀뽀하는 형을 본 다윈은 두 번 다시 그와 말을 섞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제이미는 볼에 주먹을 날려 그의 이빨을 날려 버렸고, 티나는 그를 꼬리로 후려쳐 복도 너머 사물함으로 날려버렸다. 그 결과 그는 등짝에 멍이 들게 되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그는 캐리에게 키스를 했다. 그녀는 볼이 타오를 듯이 상기된 채로 죽은 것처럼 허공에 멈추어 섰다. 자신의 초콜릿 민트 케이크는 새하얗게 잊어버린 채, 그녀는 더 이상 배가 고프지 않다며 자리를 떠 버렸다.


  시미언 선생님은 앞으로 1년간 수업이 끝나고 남으라고 했다. 스몰 선생님은 그에게 행동 교정을 받아 보라고 했다. 그리고 쏟아지는 불만에 질려버린 브라운 교장은 결국 검볼에게 한번만 더 자기에게 입을 맞추려 한다면 제적해 버리겠다고 경고하며 그에게 정학 처분을 내렸다.


  다음 반복이었다. 검볼은 복권을 가지고 장난을 좀 더 치고자 했다. 이번에는 자신이 복권에 당첨되는 대신 다른 사람들에게 당첨 번호를 뿌리고 다녔다. 이른 아침, 아침 식사가 시작되기 한 시간 전에, 그는 짓궂은 의도를 품은 채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전화기를 집어 들고는 그와 그의 가족들이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미언 선생님, 브라운 교장님, 피츠제럴드 씨와 피츠제럴드 부인, 로키, 반 친구들의 부모님들, 레인보우 팩토리, 그렇게 스쿨버스가 올 때까지 계속해서 전화를 걸어댔다. 그는 전화를 받는 사람들에게 중후하면서도 약간 가식적인 목소리로 정체를 숨기며 복권 번호 5개를 모두 불러 주었다.


  저녁 시간이 다가와 당첨 번호들이 발표되자, 검볼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발광하며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모습을 상상했다. 검볼의 기대에 부응하듯, 엘모어와 세이모어 간의 경기의 도입부는 뉴스 속보에 화면이 전환되며 중단되었다. 성난 군중들이 복권에 마흔여덟 명이 넘게 당첨된 것으로 보아 명백히 조작되었다며 폭동을 일으켰다. 카메라에 혼돈이 번져나가는 모습이 잡히는 와중에 검볼은 얼핏 시미언 선생님이 약간 맛이 간 듯한 스몰 선생님의 목을 졸라 버리는 모습을 보았다. 스몰 선생님은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검볼에게서 낄낄 깔깔 코웃음과 신나는 탄성이 화산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내일 아침이면 루프가 모든 것들을 원래대로 되돌려 버릴 테지만, 그럼에도 단순히 사람들의 반응을 관찰하기 위해 이 순간 속에서 살 수 있다는 건 정말 ‘쩌는’ 일이었다.


  바로 다음날, 검볼은 그 자그마한 장난을 반복했다. 다른 사람들을 골라 당첨 번호 5개를 알려 주자 폭동에서는 몇 가지 새로운 장면들이 연출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음 반복에서도 그는 다시 그 짓을 하고...또 하고....


  검볼도 알고 있었다. 이런 일들은 항상 처음 할 때가 가장 재미있단 걸. 놀라운 요소들이 자신의 정곡을 찌르면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는 점점 배가 되어간다. 디저트처럼 달콤하게 말이다. 또 두 번째에는 그 일을 온전하게 즐길 수 있고. 무슨 일들이 일어날 지 이미 아는 데다, 모든 것들이 자신을 놀랍게 했을 땐 보지 못했던 세세한 일들까지 잡아낼 수 있게 되니 말이다. 세 번째, 네 번째, 그리고 다섯 번째도, 그런데...


  그러고 나니 일이 터진 것이었다.




  왜 좀 더 일찍 눈치 채지 못했을까. 검볼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거의 그 무렵이 전환점이었다. 이는 상대적으로 간단했던 반복 이후의 일이었다. 그 날에는 그다지 큰일이라고 할 만한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모든 일들이, 그에게는 믿기 버거울 정도로 평범한 하루였다. 그는 교실에서도 조용히 있었고, 펩 페스트도 구경한데다 거들떠보지도 않던 그 800단어 쓰기 과제에까지 손을 댈 정도였다. 피할 수 없는 가족들의 분노에 그들을 못 본 체 해야 하는 귀찮음을 제외하면 모든 일들이 가볍게 지나갔다. 정말 단순히 말이다. 그럼에도 검볼은 그날 밤 잠자리에 들 때 뭔가 단조롭고 의욕 없는 느낌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느낌을 받았다. 일어난 순간부터 잠에 드는 순간까지도 계속되었던 느낌이었다.


  다음날 아침, 자명종 소리에 눈을 뜬 검볼은 이불 속에 있는 동안 잠시 지난 반복들을 되돌아보았다. 그는 회상을 길게 할 생각은 없었다. 허나 깨기 전에도 있었던 핏줄 속의 그 무기력한 느낌이 그 잠깐 사이에 빠르게 돌아와 허탈한 숨소리만이 튀어나왔다.


  그는 지나간 날들을 하루하루 되짚어 보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시켰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수많은 나날들이 반복되고, 똑같은 월요일 사이에 다양하고 무모한 짓들을 많이 하고 돌아다닌 결과, 검볼은 자신이 시간의 흐름을 놓쳐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이 발견은 받기 두려운 전화처럼 그에게 불편한 질문들을 읊조리는 듯 했다. 그는 이 침대에서 몇 번이나 6시 20분에 일어났을까? 아나이스는 저 문을 열고 몇 번이나 들어왔으며, 다윈은 저 어항 속에서 얼마나 많이 튀어나왔을까? 그리고 가장 생각하기 두려웠던 한 가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얼마나 많은 날들을 이 하루 속에서 살고 있던 걸까.


  검볼은 방 안을 유심히 살피었다. 여태껏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처럼, 지겨운 느낌이 들었다. 마치 이 방 안의 모든 물건들이 풀로 바닥에 들러붙어 옴짝달싹도 못 하는 듯, 마치 이상한 인형의 집의 일부인 것 같았다.


  알람시계가 계속해서 울려댔지만, 검볼은 자리에서 일어나 끌 생각이 없었다. 그 소리는 이제 더 이상 거슬리지도 않게 되었다. 그에게 신경 쓰이는 건 돌풍이나 삐걱이는 바닥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손 댈 수 있는 게 아니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일들.


  곧, 또 다른 익숙한 소리가 침대의 발치 너머에서 들려왔다. 검볼은 쳐다볼 필요도 없었다. 그는 방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아나이스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가 침대 옆에 서자 그는 아래를 내려다보곤 그녀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녀는 지난 반복 때마다 매번 똑같이 그랬듯 파란색 잠옷을 입고 조그마한 손으로 졸린 얼굴을 부비고 있었다.


  “저거 안 끌 거야?” 그녀가 하품을 내쉬며 울리는 시계를 손으로 가리키고 물었다.


  그 질문을 듣자 검볼의 귀가 까딱였다. 마지막으로 아나이스가 저 얘기를 꺼낸 지 대체 얼마나 지났었을까? 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저 얘기가 마치 하루 이틀 있던 일이 아니었던 것처럼 기억 속 어딘가에 분명하고 선명하게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검볼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알람을 꺼버린 뒤 아나이스와 어항 속에서 막 나온 다윈에게 인사를 건네려는 생각조차 않고 방을 나가버렸다. 복도에 들어선 그는 옆에 있는 화장실로 걸어갔다. 그러자, 멍한 감각이 마취제처럼 배에서부터 올라와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듯 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은 느낌도 아니었다. 그 감각은 그냥...아무 것도 아니었다. 공허하고, 재미없고, 그저 그 존재만을 느낄 수 있을 뿐.


  화장실에 들어선 검볼은 수도꼭지를 틀고 손을 받쳐 흐르는 물을 담았다. 그는 그 차가운 액체를 홀짝이고는 입을 헹구었다. 그는 물을 뱉어내곤 다시 두 손 가득 물을 받아 이번에는 얼굴에 끼얹었다. 마치 안에 느껴지지 않는 생각의 응어리가 진 듯, 머릿속이 굳어버린 느낌이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자 수염에 붙은 물방울이 흰 세면대에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퐁. 하나, 둘... 퐁.


  검볼은 잠옷셔츠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왼쪽 어깨, 바로 그곳에 누운 8자 모양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루프의 낙인은 지난날들에 비하면 그렇게 어두운 색은 아니었지만, 어째서인지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잉크같이 어두운 물질이 파란 털 밑의 피부 속으로 뿌리를 더욱 깊숙이 내린 것처럼.


  검볼은 잡았던 옷깃을 놓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스스로가 바보 같이 느껴졌다. 낙인은 달라졌을 리가 없었고,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늘 아침에 뭔가 그 낙인에 끌려 다니는 것 같은 느낌을 모른 체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그의 어깨에 새겨진 낙인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말이다.


  검볼이 자기 방으로 걸어 돌아가자, 래리가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보도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큰 소리에 반응한 다윈과 아나이스는 창문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정말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도 모르면서 말이다....눈에 들어오는 그 어떤 장면도 검볼을 동요시키지 못했다. 그는 욱신거리는 고통을 느끼고 있을 래리에게 동정심조차도 들지 않았다.


  이 무감각하고 무관심한 태도는 검볼이 방을 나선 뒤에도 변함이 없었다. 어머니가 접시를 가지고 꾸지람을 했지만 그는 한 귀로 듣고는 한 귀로 흘려버렸다. 그에게 아버지의 새 넥타이는 그저 빨간 실오라기가 목에 매달려 있는 모습에 불과했다. 마찬가지로 그 광경 또한 머릿속에 오래 남지 않았다. 데이지 후레이크는 이젠 그냥 설탕 뿌린 톱밥 같은 맛이 났다. 눈부신 햇살이 비추는 푸른 하늘, 한때는 아름답고 반가웠지만, 이제는 그저 짙은 푸른빛에 미적지근한 공기 뿐, 그밖에 다른 느낌은 없었다.


  늘 같은 색깔의 스쿨버스 안에는 늘 같은 사람들이, 늘 같은 곳에 앉아 있었다. 수업도 했던 거 하고, 전에 했던 거 하고 또 하고, 식당에서는 먹었던 음식만이 나오고 또 나오길 계속했다.


  펩 페스트? 거기에 ‘활기(pep)’ 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그의 눈에는 모든 것들이 재연이었다. 미식축구 선수들은 주어진 대사를 읊으며 달렸고, 치어리더들은 폴짝폴짝 뛰면서 이리저리 팔을 휘둘렀으며 지도 교사들은 번호를 막 내뱉어 대고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먼지 쌓인 녹슨 기계마냥 손뼉을 쳐 댔다.


  학교가 끝나고, 생기도 목적도 없는 표정을 짓던 검볼은 스쿨버스에서 내려 집 앞 보도에 멈추어 섰다. 그의 동생들이 그를 지나쳐 갔지만 그는 동생들이 보내는 걱정스러운 눈빛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버스는 부릉 소리를 내며 거리를 내달려 코너 너머로 사라졌다. 검볼은 그 자리에 뿌리가 박힌 듯 서 있었다. 그는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았고, 바닥을 내려다보는 것 말고는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저 버스가 오고 가는 소리를 그는 얼마나 많이 들었을까? 집 너머로 해넘이 하는 모습을 보며 아름답다고 느낀 건 또 얼마나 될까? 왜...왜 그는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왜 그는 이렇게...


  검볼은 무뎌져 가고 있었다. 그 자신도 왜 그런 느낌이 드는 건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했다.


  그는 지루해진 것이다.


  어이없는 변명처럼 보였다. 대부분의 신나는 일들이 늘 그렇듯, 즐길 거리들이 마르고 나면 이 때가 찾아오리란 걸 그도 예견했어야 했다. 이는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하거나, 취미 생활에 빠질 때마다 늘 일어났다. 한없이 길고, 수없이 많은 좋은 추억들조차도 결국 그 끝에는 너무 익숙해져 더 이상 보람이 느껴지지 않게 될 때까지 무뎌지기 시작했다.


  검볼은 한숨을 내뱉으며 조용한 몽상 속에서 벗어났다. 그는 여전히 밖에서 한낮의 햇빛이 비추는 회색 보도 위에 서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집이 마치 오래된 파란색 나무판자가 땅에 튀어나와 있는 것 같이 보였다. 혹시, 그는 생각했다. 만약 집 안에 들어가서 잠시 동안 침대 위에 앉아 있다 보면 뭔가 할 만한 걸 찾아내지 않을까. 어쩌면 그는 삶의 활력을 되찾게 할 또 다른 계획이나 장난을 떠올려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검볼은 스스로가 이미 그런 짓을 할 의욕이 전혀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완전히 열정을 잃어 버렸다. 의지는 이미 연소되어 흐릿해져 갔고, 결국에는 무로 돌아가 버렸다.


  마침내 단조로운 하루를 받아들이고, 침대에 누워 아무 것도 안 하기로 마음을 먹은 검볼이 첫 발걸음을 내딛자, 오른 편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생각하던 것이 그곳에 있을 거라 기대하며 울타리를 향해 돌아섰지만, 나무 기둥에 매달려 있어야 할 로빈슨 씨의 모습은 없었다. 그는 다시 그 목소리를 들었다. 당혹한 검볼이 좌우를 둘러보자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마거릿 로빈슨이 집 옆에 달린 창문을 통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는 입으로 뭔가를 중얼거렸지만 그는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뒤로 돌아 집 안으로 들어간 뒤 시야에서 사라졌다. 순간 검볼에 뇌리에 아이디어가 스쳤다. 작고 흐릿했지만, 그럼에도 시도해 볼만한 가치는 있었다.


  그는 로빈슨 씨의 집을 향해 보도를 달음질쳐 나가 대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검볼은 뭘 해야 할지 계속 고민하며 기다렸다. 확실한 건 이 생각이 자신의 지루함을 달래는 것 말고는 쓸 데가 없을 거라는 점이었다. 그래도 그는 이 계획이 단순히 아무 생각도 없이 방으로 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문 뒤에서 나무판자로부터 어렴풋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문고리가 돌려지자, 열린 문간에 게일로드 로빈슨이 두껍고 네모난 안경을 쓴 채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이거, 이거,” 그는 기쁘지도, 화가 나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이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아직도 네 시계가 고쳐지지 않은 모양이구나.”

  *역주: 원문은 ‘Father Time’, Mother Nature(대자연)처럼 시간을 의인화한 관용어입니다.


  “로빈슨 할아버지,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검볼이 그의 이웃을 올려다보며 거의 비는 것처럼 물었다.


  “그럼, 되고말고.” 나이든 인형은 어깨를 으쓱했다.


  검볼이 눈을 깜박였다. 그는 자신의 이웃이 이렇게까지 협조적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정말요?”


  “물론이지. 이쪽도 거의 두 달 동안 새로운 일이라고는 없었으니까. 수다는 환영이다. 그 상대가-”


  “두 달이요?” 검볼의 입이 쩍 벌어졌다. “두...두 달씩이나 지났다구요???”


  로빈슨 씨가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구나, 응? 자, 따라와라. 소파에 앉아서 계속 얘기하자꾸나.”


  그는 대문 너머로 검볼을 들여보낸 뒤 문을 닫고는 그를 안내했다. 누가 들어왔는지 본 마거릿이 입을 열기 전에 로빈슨 씨가 손을 올렸다. “별 거 아니야, 마거릿. 그냥 이 꼬마가 시답잖은 질문이 있다고 해서 들여보낸 것뿐이야.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털 끝 하나 방해하지 않고 나갈 테니까.”


  짜증난 듯한 마거릿이 투덜거렸지만 검볼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로빈슨 씨가 민머리에 손바닥을 후려치며 화를 냈다. “알겠어! ‘당신’ 털 끝 하나도 안 건드릴 거야! 따라와라, 꼬마야. 끝장을 보자꾸나.”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그가 투덜거렸다. “맨날 머리 갖고 심술부리기는...”


  검볼은 그를 따라 거실 안으로 들어섰다. 둘은 분홍색 줄무늬가 있는 소파에 자리를 잡았고 검볼은 잠시 방 안을 둘러보았다. 기억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꽃무늬 벽지, 흠 잡을 데 없는 앤틱 가구, 집 안을 맴도는 공기까지 검볼이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지난 번 이 집에 와서 로빈슨 씨와 이야기하며 루프에 대해 알아가던 때와 겹쳐 보이는 듯 했다. 어릴 적의 그였다면 자신이 과거로 돌아간 걸로 착각했을 것이다. 지금의 그는 그렇지 않았지만 말이다. 시간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그저 그 순간에 머물러 있었다. 딱 이 한 순간에.


  검볼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로빈슨 씨는 소파 팔걸이에 몸을 기대며 그를 주먹으로 쳤다. “그래, 네가 학교에서 루시 시미언한테 고통을 좀 선사해 주고 있다지?”


  “네? 아. 음...” 검볼은 자신이 시미언 선생님에게 저지른 대부분의 장난이 뉴스 미디어의 관심을 끌어 그 결과 엘모어 전역에 퍼졌다는 걸 잊고 있었다. 정말 놀라운 부분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뭐야, 잊어버린 게냐, 꼬마야?” 로빈슨 씨가 삐진 듯이 물었다. “나도 너처럼 루프 속에 갇혀 있다고. 낙인은 없을지 몰라도, 기억은 남아있지.”


  잠시 침묵한 채로 시간이 흘렀고, 검볼은 속이 옥죄는 기분이었다. 그는 로빈슨 씨에 대한 걸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그도 지난 몇 달 동안 같은 일만 하며 살아 왔을까? 그와 검볼은 울타리 옆에서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눈 뒤 여태까지 만나지 않았었고, 그가 이 무한한 시간 속에서 뭘 하고 사는지 신경 쓰거나 알아보려 하지도 않았다.


  “아무튼 간에,” 나이든 인형이 말을 이어갔다. “네가 선생님에게 친 장난에 대해서는 들었다.” 놀랍게도, 로빈슨 씨는 그 답지 않게 작은 미소를 씩 지어 보였다. “멋진 장난이었다, 꼬마야. 특히 서커스 광대가 가장 인상적이었어. 나도 거기 있었으면 했다. 네 장난이 내가  쳤던 것들보다 몇 배는 나은 것 같구나.” 그러곤 그는 행복했던 옛 추억들을 되살리며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할아버지도 루프에 빠진 동안 시미언 선생님을 골탕먹이셨다구요?”


  “당연히 그랬지.” 그가 웃음을 멈추며 말했다. “앞으로 그럴 기회가 많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할 수 있을 때 많이 해 먹기로 했지. 늙은 원숭이를 위한 참교육이라고나 할까. 마거릿도 그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어.”


  검볼은 그의 이웃이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하자 잠시 동안이었지만 여기 온 이유를 잊고 진정으로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그냥 늘 하던 걸 반복하는 대신 이렇게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니 놀라울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즉흥적이고, 뭔가 새롭고, 신선한 이 느낌이 검볼의 단조로운 일상에 편안함을 가져다주었다.


  로빈슨 씨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냉정한 태도로 돌아왔다. “자,” 그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원하는 게 뭐냐?”


  검볼은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가 정녕 묻고 싶은 말이 뭐였을까? 무엇이 그의 뇌를 속여서 그를 이렇게 피곤하게 만드는 걸까? 벌써 잊어버렸을 리는 없었다. 생각한 지 얼마나 됐다고, 한 1분?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기억이 돌아온 것이 아니라 바깥에 서 있을 무렵에 있었던 문이 열린 찰나의 일 때문이었다.


  “로빈슨 할아버지, 정말...정말로 두 달이나 지났어요?”


  그의 이웃은 표정의 변화 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대충 그 정도 지났지. 어쩌면 좀 더 됐을지도. 요즘 들어서 세는 걸 그만뒀단다. 그리고 아까 전에 대문 밖에 서 있던 네 얼굴로 봤을 때 너도 마찬가지인 것 같구나.”


  “음...그렇죠.” 검볼이 무안한 듯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시작도 안 했지만요.”


  노인이 무심한 듯이 눈을 깜박였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냐?”


  검볼은 잠시 멈추었다. 자신에 대해서 정말로 아는 것이 없었다. 로빈슨 씨를 침묵 속에 기다리게 두면 자신에게 소리를 지를까 두려워진 검볼은 왜 이곳에 오게 됐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루프에서 빠져나갈 방도를 찾고 싶어요.”


  로빈슨 씨는 여전히 팔걸이에 몸을 기댄 채로 쳐다보았다. “진심이냐?”


  “그런...데요?” 검볼이 그 질문에 눈썹을 치켜들었다.


  “흠...난 네가 좀 더 빈둥거리고 싶어 할 줄 알았는데. 내가 봤던 네 모습은 아직 한참 한 끗발 날리고 있던데 말이다.”


  “그랬죠...그렇게 시간을 보내니까 정말 즐거웠어요.” 검볼이 말했다. “이제는 그냥 그러고 싶지가 않더라구요. 이 모든 일들...모든 게 그냥-”


  “밍밍하던? 무미건조해? 질리더냐?”


  “...네...”


  로빈슨 씨가 몸을 앞으로 내밀며 자신의 손을 검볼의 무릎 위에 올렸다. “꼬마야,” 그가 말했다. “내가 이름짓길, 넌 루프의 ‘매듭’에 다다른 게다.”


  그는 잠시 멈추었다. 계속하기 전에 검볼의 당혹감을 먼저 가라앉히려는 모양이었다. “넌 이제 더 이상 루프 속의 이 하루가 더 이상 만족스럽지 못하게 되는 시점까지 온 거야. 네가 가진 자유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최종적으로, 겨우 24시간밖에 안 되는 쥐꼬리만한 시간 앞에서는 그 모든 자유조차도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거지. 자, 이제 네 시간은 새로운 일 하나 없는 곳에 지나지 않게 된 거다. 이건 마치 파티에 갔는데 넌 바닥에 긴 밧줄로 묶여 있는 처지인 셈이지. 두껍고, 팽팽한 매듭으로 말이다. 네가 벗어나려 할 때마다 그것이 널 계속해서 그 자리에 묶어 둘 게다. 네가 전에 이미 해봤던 일들로 아무리 변주를 만들려고 발버둥 쳐도 결국 더 지루해지고 지쳐 버리게 되는 거지.”


  검볼은 자리에 앉은 채로 귀를 기울였다. 매듭에 대한 구체적인 예시가 밖에 서서 멍하니 아무 것도 바라보고 있지 않을 때보다 더 실질적으로 다가왔다. 반면 그의 상상력은 로빈슨씨가 말하는 끝나지 않는 파티와는 다른 모델을 제시했다. 그는 어깨에 새겨진 낙인에 대한 생각과 그 한가운데, 두 선이 교차하는 지점에 붙잡혀 있다는 상상을 했다. 이는 거의 숨이 막힐 것만 같은 느낌을 주었다. 마치 매듭이 몸 곳곳의 혈류를 끊어 놓는 듯, 그를 너무나도 약하게 했다. 검볼은 어깨를 손으로 문지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낙인이 아침때보다도 더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로빈슨 씨가 말을 이어갔다. “꼬마야, 이게 너한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루프에 있었을 때는 나도 매듭에 묶여 본 적이 있단다. 이상한 기분이었지...사실 그동안 즐겨왔던 어떤 재미보다도 그 기억이 훨씬 생생해. 하지만 난 그 이유가 아무것도 안 하는 데 시간을 더 많이 투자하기 시작해서 그렇다고 본다.”


  “어떤 느낌이었어요?” 검볼이 물었다. 답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지만서도.


  로빈슨 씨가 코웃음을 쳤다. “재미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렵지도 않았어. 정말, 그냥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냥 나 자신이 한 군데에 갇혀 있던 게 다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고, 다른 사람들과 얘기하고 함께할 수 있었지. 내가 엘모어를 떠나서 평생 꿈도 꿔 보지 못했던 곳까지 가고 싶다면 갈 수도 있었어. 하지만, 내가 뭘 하든, 또 내가 얼마나 멀리까지 여행을 떠나든, 난 항상 똑같은 침대 위에서 똑같은 방 안에 둘러싸인 채로 눈을 떠야만 했다. 무대 공연을 위한 배경 속에서 사는 느낌이었지.”


  “난 여전히 내 성미를 주체하는 데 미숙했고, 모든 일들에 불만이 남아 있었다. 그런 반복이 계속될 때마다 좌절감만 커질 뿐이었어. 그 어떤 것도 새롭지 않았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들여다볼만한 가치를 점점 더 잃어갔지. 그건...슬픈 일이었단다...” 로빈슨 씨의 눈빛이 약해졌다. 그는 앞에 있는 벽을 노려보았다. 딱히 볼만한 것은 눈에 띄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는 확실히 우울해 보였다. “네게 뭔가 아름다운 것, 네 삶의 의미를 이루게 만드는 것, 그게 뭐든 간에, 네 집이건, 네 동네건, 너에게 가장 가까운 것들을 볼 수 있다는 일과 그 모든 걸 얻고도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는 일...더 이상 아무 것도 느낄 수 없게 되는 일....”


  노인은 말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이제 말은 필요하지 않아 보였다. 그는 혼자 폭풍우가 이는 어둠 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검볼은 자신의 이웃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 몰랐다. 그는 그가 정말로 안쓰러웠다.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는 몰라도, 로빈슨 씨는 고개를 저어 마음을 추스르고는 안경을 고쳐 썼다. “약한 모습을 보여서 미안하다. 자, 이젠 네 차례야. 네가 다음으로 뭘 할지 떠올랐으면 좋겠구나.”


  검볼이 얼굴을 찌푸렸다. “아뇨...감도 안 잡혀요. 그냥 뭐가 절 여기 붙잡아두는 건지 알 수가 없어요.”


  “내가 왜 시간 루프가 생기는지 얘기해줬던 거, 기억 나냐?”


  “아마도요...?” 검볼이 주저하며 오래전 대화에서 뭐라도 건져내려 애썼다. “음...제가 뭔가 잘못한 게 있어서 그걸 고쳐야 한다는 얘기하고...또...” 검볼이 그 속에 답이라도 있는 듯이 머리를 쿡쿡 찔러댔다.


  “두 번째...제가 뭔가를 놓쳤다는 얘기?”


  “네가 뭔갈 잊어버린 게다.”


  “뭘 잊어버려요?”


  “아니, 아니!” 로빈슨 씨가 고개를 저었다. “널 시간 루프 속에 갇히게 하는 두번째 주된 이유는 네가 뭔가 중요한 걸 잊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네가 배워야 할 교훈일 수도 있고, 어쩌면 되짚어 봐야 할 일일지도 모르지. 자...뭐 잊어버린 게 있냐?”


  “글쎄요...” 검볼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제가 알았으면 ‘저도’ 이러고 있진 않겠죠.”


  그는 살짝 웃음을 터뜨렸지만 로빈슨 씨가 인상을 쓴 채로 가만히 있자 웃음을 그쳤다.


  “됐다. 신경 꺼라.” 나이든 인형이 말했다. “네가 뭔가 잘못한 건? 그러니까, 요즘 네가 치고 다니는 장난이랑 기행은 제외하고 말이다. 그것들은 모두 루프 ‘속’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우리도 그건 별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 네가 여기 갇히기 전에, 일들이 반복되기 전에 저질렀던 것들 가운데서 말이다.”


  검볼은 소파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건 지난번에 얘기했던 것 같은데요. 고치려고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다 해봤어요. 엄마의 접시랑, 다윈의 성적, 아빠의 넥타이, 펩 페스트까지. 부질없는 일이었지만요.”


  “그건 반쪽짜리 정답이라고 해야겠구나.”


  “무슨 말이에요?”


  “뭐랄까, 그 일들은 네가 루프에 걸린 이유가 아닐지도 몰라. 그래도 그 일들도 그 나름대로는 중요할지도 모르지. 쉽게 말하자면 그 일들이 네 하루를 더 나은 날로 만들어 주거나 네가 나아갈 방향을 찾는 걸 도와줄지도 모른다는 얘기야. 내가 너였다면, 아마 계속해서 고치려 노력했을 게야.”


  “꼬마야, 내가 보기에는 말이다, 네가 뭔가 잊어버린 것이 있는 것 같구나. 네가 저지른 실수든 네가 간과한 사실이든 간에, 그 뭔가가 바로 네가 찾는 열쇠일 게다.”


  “음, 알겠어요.” 검볼이 약간 짜증이 난 얼굴로 다시 꼿꼿이 일어섰다. “정말 확실한 정보네요.”


  “너한테는 그렇지 않아. 그렇게 쉽지가 않지.” 로빈슨 씨가 인상을 썼다. “무엇이 지금 널 이 끝나지 않는 월요일에 묶어놓는지 네가 모르니 말이다. 어쩌면 주변 사람들한테 그게 무엇인지 아는지 물어보고 다니는 게 어떤가 싶다. 어쩌면 그 사람들의 말이 뭔가를 깨닫게 해 줄지도 모르지.”


  검볼의 눈살을 찌푸렸다. “잠깐만요, 그게 될 거라고 생각하세요? 아무도 하루가 끝나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거라구요. 그 사람들한테는 그냥 평범한 월요일에 불과하잖아요.”


  “글쎄다, 혹시 모르지.” 로빈슨 씨가 어깨를 으쓱했다. “말했듯이, 어쩌면 그건 오늘 일어난 일이 ‘아닐’ 수도 있어. 어쩌면 루프가 시작되기 이전에 일어난 일일지도 모르지.”


  잠시 정적이 흐르며 로빈슨 씨의 시선이 뒤에 있는 부엌 쪽으로 향했다. 그는 작게 투덜대고는 호통을 쳤다. “알겠어, 마거릿! 간다고! 가발이나 쓰고 있어!”


  검볼은 당황스러웠다. “전 아무것도 못 들었어요.”


  “전에 말해 줬듯이 말이다. 그런 사람이 거의 없지. 넌 이제 나가야 돼. 난 이제 준비하는 걸 도와준 다음에 치킨 알프레도를 300번째로 먹을 게다. 그 반면에 ‘너’는 조사를 좀 해 줘야겠어. 부탁이다, 이 루프 속에서 ‘좀’ 나가려고 해 봐라. 이제 알프레도 소스 때문에 점점 미각을 잃어가고 있다고. 그럼 이제...나가아아아아아아!!!”


  검볼은 이번에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차분하게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대화는 끝났지만 여전히 어딘가 찜찜했다. 대문을 향해 다가가며, 그는 로빈슨 씨가 빨리 나가라고 소리 지를 거라고 생각했다.


  “얘, 꼬마야.”


  검볼이 멈추곤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그의 이웃은 호통을 치지 않았다.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있다면, 로빈슨 씨의 눈빛은 평온하고도 동정어린 눈치였다.


  그는 말을 잇기 전에 한숨을 내쉬었다. “꼬마야...그냥 최선을 다해라. 난 널 여기 잡아두는 게, 우릴 여기 잡아 두는 게, 뭐든 간에 그렇게 복잡하진 않을 거라고 본다. 좀 우습지.” 그리고 그는 미소 비스무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루프 같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일은 거의 대부분 가장 단순한 이유로 생긴단다. 그러니까, 나한테 루프는 그냥 진정하는 법을 배우는 간단한 문제에 불과했어.”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는 즐거운 듯, 지루한 듯, 두 기분이 섞여 있었다. 안경을 다시 고쳐 쓰며 그는 소파에서 일어섰다. “꼬마야, 최선을 다해라. 너무 무리하진 말고.”


  검볼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로빈슨 할아버지.” 검볼은 대문에 다다를수록 물어보러 오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이 생각까지 이르게 된 건지는 아직도 미스터리였지만, 그렇게까지 중요하지는 않았다. 이웃과의 이 짧은 대화는 그가 바랐던 것처럼 이해하기 쉽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그가 받은 조언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게다가, 자신의 처지를 아는 사람과 대화하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비록 그 사람이 거의 늘 까칠한 사람일지라도 말이다.




  다시 보도에 들어서자, 저녁 무렵의 햇살이 따뜻하게 비춰왔다. 검볼은 자신이 조난당한 배를 타고 바다처럼 깊은 안개 속을 표류하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짙고도 넓은 회색 안개 속엔 희미한 불빛만이 보일 뿐, 등대에는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그래도...최소한 그를 인도해 줄 등대는 존재했다. 등대...매듭을 풀어낼 열쇠...분명 저 너머 어딘가에 있을 터. 이제 그는 올바른 방향을 찾아 그리로 나아가야 했다.


  검볼은 집 앞에 서 있었다. 오늘 하루가 끝나고, 다시 시작될 곳.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으며 그는 로빈슨 씨와의 대화를 떠올리고는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만약 자신이 루프에서 빠져나가고자 한다면, 정보를 수집하고 이 무한히 뻗은 하루의 시간선 어딘가에 있을 답을 찾아내기를 빌어야 할 것이다. 대문 앞에 선 검볼은 할 일이 쌓여 있다는 생각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봤을 때, 이 일은 광활한 잔디밭에서 바늘을 찾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이를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내일은 영원히 손에 들어오지 않을 테고, 그는 오늘을 영원히 되풀이하며 고통 받게 될 것이니.


  그는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고는 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실에는 어둠이 깔려 있었지만,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포근한 햇살이 거실을 밝게 비추었다. 그는 가장 햇살이 잘 드는 소파에 앉아 금붕어 오빠와 함께 TV를 보고 있는 아나이스 곁에 앉았다.


  “아...” 아나이스가 양손으로 머리를 받치며 편안한 목소리로 한숨을 내쉬었다. “과학 채널이 최고야.”


  검볼은 TV 속에 수많은 별들과 행성들이 스쳐가는 모습을 보았다. 지구가 검은 액체 속 청록색 방울처럼 나와 빙글빙글 돌았고, 그 위로 프로그램의 제목이 나타났다.


과학 시간


  그 아래에는 소괄호가 쳐진 문자열이 하나 있었다.


방구석 과포자들과 이과생 모두를 위한 참 쉬운 고급 과학


  이 문구는 불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재밌어 보여 검볼의 두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곧, 갑자기 그는 굉장히 흥분되기 시작했다. 깨달음이 천상의 목소리처럼 그에게 다다랐다. 등대로 향하는 첫 번째 잠재적 단서, 루프의 단단한 매듭의 느슨한 첫 번째 실밥, 그것이 이 방 안에 그와 함께 앉아 있던 것이다!


  아나이스가 귀여우면서도 진지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귀를 기울이다 뭔가 있어 보이는 인트로가 나오기 시작하자 싱글벙글하며 웃었다. 반면 검볼은 귀를 기울이기에는 정신이 너무 산만했다. 그는 충동적으로 소파에서 일어나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고, 그러면서도 시선을 소파와 분홍색 귀에서 떼지 않았다.


  검볼은 어둠이 짙게 깔린 방의 문을 닫고 침대와 자명종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머리를 싸매기 시작했다.


  어쩌면 탐문을 시작할 첫 번째 장소를 방금 발견한 걸지도 모르니.




  [MsPenguin]


  대충 어디까지 왔나 싶은 분들을 위해서 검볼의 내적 갈등 심화도를 중심으로 플롯을 구분시켜 봤습니다.


  프롤로그: 1장 - 2장

  발단: 3장 – 17장

  갈등: 18장 - 24장

  절정: 25장 - 30장

  대단원: 31장 - 37장

  에필로그: 3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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